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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소 5세 (프로방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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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소 5세는 844년 또는 850년경 로트링겐에서 태어나 프로방스와 부르군트의 왕으로 즉위한 인물이다. 서프랑크 왕국의 대머리 카를의 시종으로 시작하여 리옹 백작, 비엔나 백작, 이탈리아 공작 등을 역임했으며, 879년 말더듬이 왕 루이 2세가 사망하자 프로방스와 부르군트의 왕으로 즉위했다. 카롤링거 왕조와 갈등을 겪으며 비엔나에서 포위되기도 했으며, 887년 사망 후 아들 맹인 루이가 왕위를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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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소 5세 (프로방스) - [인물]에 관한 문서

2. 생애

보소는 844년 또는 850년경 로트링겐의 유력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로트링겐 백작 비빈 드 고르즈, 어머니는 토리노 후작 보소의 딸 리첼다였다. 외삼촌 힉베르트 사후 성 마우리키우스 수도원의 평신도 수도원장직을 계승했다.

870년, 여동생 리실드가 서프랑크 왕국의 왕 샤를 2세(대머리왕)와 결혼하면서 보소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기회를 얻었다. 왕의 처남으로서 두터운 신임을 얻은 그는 리옹과 비엔 백작, 말더듬이왕 루이 2세의 집사 겸 호위대장, 부르주 백작 등 주요 관직을 역임하며 서프랑크 왕국 내에서 빠르게 권력 기반을 다졌다. 875년 샤를 2세의 이탈리아 원정에 동행했고, 876년에는 이탈리아 총독 겸 공작으로 임명되어 사실상 부왕(副王)처럼 행세했다. 또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도비코 2세의 외동딸 이르멘가르트와 결혼하여 정치적 위상을 더욱 공고히 했다.

879년 말더듬이왕 루이 2세가 사망하자, 보소는 카롤링거 왕조의 후계자인 루이 3세와 카를로만 2세 형제에게 충성을 거부하고 독립적인 행보를 보였다.[6] 같은 해 10월 15일, 망타이유 공의회에서 론강과 사온느 강 유역의 주교들과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 프로방스와 부르군트의 왕으로 선출되었다. 이는 카롤링거 왕조 출신이 아닌 인물이 서유럽에서 왕위에 오른 첫 사례였다.[1][6]

그러나 보소의 왕위 계승은 카롤링거 왕조 군주들의 즉각적인 반발을 샀다. 서프랑크의 루이 3세와 카를로만 2세, 동프랑크의 카를 3세(비만왕) 등 카롤링거 군주들은 연합하여 보소를 공격했다. 여러 차례의 전쟁 끝에 882년, 보소는 자신의 동생인 부르고뉴 공작 리샤르 정의공에게 비엔을 함락당했고, 세력이 크게 약화되어 비엔 백작 수준으로 영향력이 축소되었다.[1]

887년 1월 10일 보소는 사망했으며, 시신은 비엔나의 세인트 모리스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의 사후 어린 아들 맹인왕 루이가 왕위를 계승했으나, 보소가 세운 왕국은 결국 분열되어 일부는 부르군트 왕국으로, 다른 일부는 훗날 프랑스 왕국으로 편입되었다.

2. 1. 가계 배경과 초기 활동

보소 드 프로방스는 844년 또는 850년 무렵 로트링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로트링겐 백작이자 고르즈의 평신도 수도원장인 비빈 드 고르즈이며, 어머니는 토리노 후작 보소의 딸인 아를의 리첼다이다. 그의 아버지 비빈은 카롤루스 제국의 분열 과정에서 경건왕 루트비히와 그의 아들들 사이에 벌어진 상속권 및 영토 분할 분쟁 당시, 이탈리아의 군주였던 로타르 1세를 지지하며 활동했다. 반면, 보소의 친삼촌이자 비빈의 동생인 리샤르는 경건왕 루트비히의 편에서 싸웠다.

보소의 외할아버지인 보소 드 토리노(855년 사망)는 토리노와 로트링겐의 후작이었으며, 아를 백작과 이탈리아 백작 등의 지위도 겸했다. 외할머니는 인겔트루드(Ingeltrud)였다. 외할아버지에게는 리첼다 외에도 여러 자녀가 있었다. 보소의 외삼촌으로는 아버지의 작위를 계승한 보소, 성 마우리키우스 수도원의 평신도 수도원장이었던 힉베르트(Hucbert), 그리고 발루아 백작이었던 또 다른 보소가 있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다른 외삼촌 한 명은 론 계곡에서 쥐라산맥알프스산맥 근처를 무대로 활동하던 노상 강도였다고 전해진다. 보소의 이모 토이트베르가는 로트링겐의 군주 로타르 2세의 정비였다. 로타르 2세는 정비인 토이트베르가에게서 후계자를 얻지 못하자, 그녀가 자신의 오빠인 힉베르트와 근친상간을 저질렀다는 소문을 퍼뜨리며 이혼을 시도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외삼촌 힉베르트는 후에 벨프 가문의 콘라트 2세와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사망했다. 보소는 869년 사망한 외삼촌 힉베르트의 뒤를 이어 성 마우리키우스 수도원의 평신도 수도원장직을 물려받았다. 훗날 부르군트와 이탈리아의 군주가 되는 아를의 위그와 그의 아들 로타리오 3세는 보소의 외삼촌 힉베르트의 손자들이었다.

870년, 서프랑크 왕국의 국왕 샤를 2세(대머리왕)가 보소의 여동생 리실드와 결혼하면서 보소는 왕의 처남이 되는 중요한 정치적 기회를 얻었다. 이 결혼 이후 보소는 샤를 2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의 신임을 얻었다. 같은 해, 보소는 지라르 드 루시용을 대신하여 리옹과 비엔의 백작으로 임명되었다.

872년, 샤를 2세는 보소를 왕위 계승자인 루이 2세(말더듬이왕)의 집사 및 호위대장으로 임명하며 신임을 더했다. 또한 부르주 백작 지위도 부여받았다. 당시 루이 2세는 아키텐의 부왕(Sub-king)으로 있었지만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왕국의 실제적인 통치 업무는 보소가 상당 부분 담당했다.

875년 가을, 보소는 샤를 2세의 첫 번째 이탈리아 원정에 동행했다. 876년 2월, 파비아에서 열린 의회에서 샤를 2세는 보소를 이탈리아 왕국의 수석 대신 겸 총독으로 임명하고 공작으로 격상시켰다. 이 시기에 프로방스 지역의 통치권 역시 그에게 위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보소는 이탈리아에서 부왕(副王)처럼 행동하며,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이탈리아의 왕이었던 루도비코 2세의 외동딸인 이르멘가르트와 결혼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한층 더 강화했다.

2. 2. 서프랑크 왕국에서의 활동

860년 무렵 보소는 이미 서프랑크의 왕 대머리 카를의 시종이었다. 870년 그의 누이동생 리첼다가 카를 2세와 결혼하면서 보소는 서프랑크의 유력 귀족으로 부상했고, 카롤링거 왕조와 이중 인척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 결혼은 보소가 왕의 신임을 얻고 권력 기반을 다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870년 초가을, 메르센 조약 체결을 전후하여 보소는 고티아의 베른하르트와 함께 출정하여 당시 프로방스 지역의 실력자였던 루시용의 게르하르트를 격파했다. 대머리 카를은 로타르 2세에게 충성했던 게르하르트를 견제하며 그의 작위와 영지를 상당 부분 보소에게 넘겨주었다. 같은 해 카를 2세는 게르하르트에게서 리옹과 비엔나 백작직을 빼앗아 보소에게 수여했으며, 가을에는 트루아 백작직도 추가로 받았다. (트루아 백작령은 훗날 루이 3세, 샤를로망 형제 및 카를 3세에게 패배하며 상실하게 된다.)

871년 1월, 카를 2세는 게르하르트의 영지였던 비엔나와 리옹, 그리고 시르주한 부르군드(훗날의 프로방스)의 주지사 직에 보소를 임명했다. 872년에는 아키텐 왕국의 궁정 행정관으로 임명되어, 당시 아키텐의 명목상 왕이었던 말더듬이 왕 루이 2세를 대신하여 실질적인 행정을 담당했다. 그는 '실권자'이자 '문지기장'(magister ostiariorum|마기스테르 오스티아리오룸la)으로 불렸으며, 부르주 백작직과 체임벌린 주지사직도 겸임하게 되었다.

875년 가을, 보소는 카를 2세의 첫 이탈리아 원정에 동행하여 파비아까지 수행했다. 파비아에서 카를 2세가 교황 요한 8세로부터 신성 로마 제국 황제관을 받자, 카를은 보소를 이탈리아 공작프로방스 공작으로 임명했다. 876년 2월, 카를 2세는 보소를 이탈리아 총독(missus dominicus|미수스 도미니쿠스la)이자 최고 재상으로 임명하여 롬바르드로 파견했고, 보소는 파비아에 머물며 이탈리아를 통치했다. 그의 친척인 프로방스와 부르군트 귀족 일부도 이탈리아에 함께 상주했다. 같은 해 3월, 보소는 누이 리첼다의 적극적인 주선으로 이탈리아인 루트비히 2세의 외동딸 이르멘가르트와 결혼하여 위상을 더욱 높였다. 카를 2세는 이탈리아에서의 자신의 대리인으로 보소를 매우 선호하였다.

877년, 보소는 카를 2세의 두 번째 이탈리아 원정에 반대하며 뜻을 같이하는 다른 귀족들과 함께 왕에게 반기를 들었다. 같은 해 5월, 보소는 카를 2세의 소환으로 서프랑크로 귀환했고, 카를 2세는 대신 위그를 이탈리아 총독으로 파견했다. 보소는 카를 2세에게 다시 이탈리아 원정을 건의했으나, 카를 2세는 그해 10월에 사망했다. 카를 2세 사후, 반기를 들었던 귀족들은 그의 아들 말더듬이 루이 2세에게 압력을 넣어 자신들의 권리와 특권을 인정받도록 했다. 보소는 877년 카를 2세가 사망하고 바이에른의 카를만이 침공할 때까지 이탈리아 총독으로 재직했다.[8] 이탈리아로 돌아간 보소는 교황에게 말더듬이 루이 2세에게 신성 로마 제국 황제관을 수여할 것을 강요했다. 같은 해, 그의 삼촌인 에크하르트 백작이 사망하자 보소는 마콩살롱 카운티를 상속받아 론강 계곡 주변의 영지를 확장했다.

보소는 교황청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878년 9월, 그는 교황 요한 8세와 함께 트루아로 가서 교황이 루이 2세에게 이탈리아에서의 지원을 요청하는 자리에 동행했다. 교황은 보소를 양자로 삼았으며, 루이 2세에게 황제 대관식을 제안했을 가능성이 있다. 일설에 따르면 교황은 보소를 황제로 즉위시키기를 희망했다고도 전해진다.[2][5]

2. 3. 프로방스와 부르군트의 왕

보소의 대관식을 묘사한 그림 (14세기작)


879년 4월, 서프랑크 왕국의 말더듬이왕 루이 2세가 갑자기 사망하자, 보소는 다른 서프랑크 귀족들과 함께 루이 2세의 아들 루이 3세를 유일한 후계자로 만들려 했으나, 결국 루이 3세와 그의 동생 카를로만 2세가 공동 왕으로 선출되었다.[1] 보소는 이 두 형제에게 충성을 맹세하기를 거부하고, 879년 7월 Dei gratia id quod sum|데 그라티아 이드 쿠오드 숨la (신의 은총으로 내가 바로 그것이다)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며 사실상 독립을 선언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장인인 황제 루도비코 2세가 자신을 후계자로 지명했다고 주장했다.[1]

879년 10월 15일, 론강과 사온느 강 유역의 주교들과 귀족들이 망타이유 공의회(Council of Mantaille)에 모여 보소를 말더듬이 루이 2세의 후계자이자 왕으로 선출했다. 이로써 보소는 카롤링거 왕조 출신이 아닌 왕으로는 서유럽에서 1세기 이상 만에 처음 등장한 인물이 되었다.[1] 이 사건은 왕족 혈통을 고려하지 않고 성직자 선거의 원칙에 따라 이루어진 프랑크족 최초의 "자유 선거"로 평가받는다.[1] 보소를 지지한 세력은 아를, 오툉, 아비뇽, 본느, 브장송의 6개 지역 대주교와 17명의 주교들이었으며, 살롱, 디종, 제네바, 그르노블, 랑그르, 로잔, 리옹, 마콘, 마르세유, 트루아, 발렌시아, 비엔나, 타렌타이즈(Tarentaise), 토레네(Tonnerre) 등의 주교와 성직자들도 옛 부르군트 왕국을 복원하겠다는 그의 뜻에 동조하여 지지를 보냈다. 보소는 비엔나와 갈리아 지역의 저명한 법률가들을 고용하여 자신의 법관으로 삼았다.

보소의 왕국은 일반적으로 프로방스 왕국으로 불리며, 아를, 엑스, 비엔, 리옹(랑그르 제외), 그리고 아마도 브장송의 교회 관구와 타랑테즈, 위제스, 비비에 교구를 포함했다. 그의 영지는 프로방스, 부르군트, 론 강 남쪽 일대, 제네바 호수와 지중해 연안 지역에 걸쳐 있었다.

881년 카롤링거 왕국 내 보소의 왕국(주황색)


한편, 보소의 측근들은 혼란한 이탈리아의 왕관을 그에게 주려 했으나, 교황 요한네스 8세는 이를 거절했다. 880년 7월, 보소는 컨피던스 수도원장 길리온 드 투르뉘(Gilon de Tournus)를 랑그르의 백작 주교로 임명했다.

880년 3월, 아미앵에서 아버지의 왕국을 분할한 루이 3세와 카를로만 2세 형제는 연합하여 보소를 공격했다. 그들은 마콩을 비롯한 보소 왕국의 북부 지역을 점령했다. 이후 동프랑크 왕국의 비만왕 카를 군대와 합류하여 880년 8월부터 11월까지 비엔을 포위 공격했으나 함락에는 실패했다.[1]

그러나 882년 8월, 보소는 자신의 형제이자 부르고뉴 공작이며 오툉 백작인 정의공 리샤르에게 다시 비엔을 포위당했고, 결국 9월에 도시는 함락되었다. 이 패배 이후 보소는 왕국의 많은 부분을 되찾지 못하고 세력이 크게 약화되어 비엔 백작 수준으로 영향력이 축소되었다.[1]

보소는 887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맹인 루이가 왕위를 계승했다.[1]

2. 4. 카롤링거 왕조와의 갈등

879년 4월, 서프랑크 왕국의 왕 말더듬이 루이가 사망하자 그의 두 아들 루이 3세와 카를로만 2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보소는 다른 서프랑크 귀족들과 함께 루이 3세를 단독 왕으로 옹립하려 했으나, 결국 두 형제가 공동으로 왕위에 올랐다. 이에 보소는 두 형제에게 충성을 거부하고 7월에 Dei gratia id quod sum|신의 은총으로 내가 바로 그것이다la라는 칭호를 사용하며 사실상 독립을 선언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장인이었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트비히 2세가 자신을 후계자로 지명했다고 주장하며 황제관을 요구하기도 했다.[6]

879년 10월 15일, 론 강과 손 강 유역의 주교와 귀족들이 망타이유 공의회에 모여 보소를 말더듬이 루이의 후계자이자 왕으로 선출했다. 이는 카롤링거 왕조 출신이 아닌 인물이 왕으로 선출된 첫 사례로, 왕족 혈통보다는 성직자 선거의 원칙에 따른 '자유 선거'의 성격을 띠었다.[1][6] 보소가 다스리게 된 왕국은 일반적으로 프로방스 왕국이라 불리며, 아를, 엑스, 비엔, 리옹(랑그르 제외), 브장송의 교회 관구와 타랑테즈, 위제스, 비비에 교구 등을 포함했다.

보소의 독립적인 왕위 계승은 카롤링거 왕조의 반발을 샀다. 880년 3월, 아미앵에서 아버지의 영토를 분할한 루이 3세와 카를로만 2세 형제는 군대를 일으켜 보소를 공격했다. 그들은 보소의 영지 북부인 마콩 등을 점령하고, 동프랑크의 카를 3세 비만왕과 연합하여 8월부터 11월까지 비엔을 포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이듬해인 881년 8월부터 11월까지 보소는 비엔에서 루이 3세, 카를로만 2세, 카를 3세의 연합군과 다시 맞서 싸웠다. 카롤링거 연합군의 비엔나 공격은 실패했지만, 이 과정에서 보소의 군대 일부가 이탈했고, 그의 영지였던 오툉, 브장송, 샬롱, 마콘 등이 점령당했다.

882년 8월, 보소는 그의 친동생인 부르고뉴 공작 리샤르 정의공이 이끄는 군대에 의해 비엔에서 다시 포위되었다. 이 포위 공격 중에 비엔나에 남아 있던 보소의 아내 이르멘가르다와 아들 맹인왕 루이는 리샤르 정의공의 항복 회유에 따라 그해 9월 카를 3세에게 넘겨졌다. 결국 비엔나는 리샤르 정의공에게 함락되었고, 보소는 왕국의 대부분을 잃고 비엔 백작의 지위로 위축되었다. 그는 887년에 사망했고, 아들 루이가 뒤를 이었다.

2. 5. 죽음과 유산

보소는 887년 1월 10일 사망했으며, 그의 시신은 비엔나의 세인트 모리스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의 사망 직후 영지는 카를 3세에게 넘어갔다. 보소의 아내 이탈리아의 이르멘가르트는 자신의 5촌 아저씨이자 외삼촌인 동프랑크의 카를 3세에게 아들 맹인왕 루트비히의 보호를 요청했고, 카를 3세는 이를 수락하여 루트비히의 후견인이자 양아버지가 되었다.

888년 11월, 카를 3세가 아르눌프에게 폐위되면서, 보소의 영지는 아들 맹인왕 루트비히에게 계승되었다. 그러나 보소의 친동생인 리처드 정의공은 조카 루트비히를 보호하는 데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보소 사후 그의 왕국은 분할되었다. 아들 맹인왕 루트비히와 그의 친척인 이탈리아의 위그가 하 부르고뉴와 프로방스를 계승하였고, 보소의 사위이자 먼 친척인 콘라디안 가문의 루돌프 1세는 888년 상 부르고뉴를 차지했다. 보소의 딸 프로방스의 윌라(873년 ~ 914년)는 루돌프 1세와 결혼했으며, 루돌프 1세 사후에는 보소의 친척이기도 한 아를의 위그와 재혼했다. 이후 루돌프 1세의 아들 루돌프 2세는 맹인왕 루트비히와 조약을 체결하고 이탈리아의 위그로부터 하 부르고뉴를 넘겨받아 부르고뉴를 재통일했다.

한편, 부르고뉴의 손 강 서쪽 지역은 보소의 동생인 오툉 공작 리처드 정의공이 차지했으며, 이후 그의 아들인 부르고뉴의 라울에게 계승되었다. 그 뒤 이 영지는 라울의 처남인 대 위그에게 넘어갔다가, 대 위그의 아들 위그 카페 시대에 프랑스의 영지로 병합되었다.

3. 가족 관계

2. 위그첫 번째 부인의 딸로 추정.[3] 이르멘가르트와의 결혼 전에 태어났으므로 이르멘가르트가 어머니라는 기록은 오류로 보인다.엥겔베르가 (엥겔베르주)877년 – 917년아키텐 공작 기욤 1세이르멘가르트의 딸[3]에르멘가르다877년경 – 935년샬롱 백작 마나세 1세이르멘가르트의 딸. 지르베르 드 샬롱의 어머니.루이 3세 (맹인왕)880년경/884년 이전 – 928년 6월 5일1. 안나/에우도키아 마미코니안 (추정)
2. 부르군디의 아델라이드 (길라의 딸일 가능성 있음)이르멘가르트의 딸.
프로방스 왕 (887년–928년), 이탈리아 왕 (900년–905년), 신성 로마 황제 (901년–905년)


4. 기타

보소 5세 사후 부르고뉴 지역은 여러 과정을 거쳐 변화하였다. 서부의 부르고뉴 공국은 후일 프랑스 발루아 왕가의 장 2세가 자신의 아들 필립에게 수여하였다. 필립의 증손 샤를의 딸 마르그리트가 합스부르크가의 막시밀리안과 결혼하면서 잠시 독일 지역의 영향 아래 놓였으나, 루이 13세 때에 다시 프랑스가 차지하게 된다.

한편, 손 강 동쪽의 부르고뉴 왕국 지역은 보소 5세의 친척인 콘라디안 가문이 단절된 후, 인척 관계였던 살리어 왕가의 콘라트 2세에게 계승되었다. 이후 1254년 콘라트 2세의 후손인 콘라딘이 사망하자 프랑스가 이 지역을 병합하였다.

참조

[1] 간행물 The Bosonids or Rising to Power in the Late Carolingian Age https://books.google[...] Duke University Press 1988-04-01
[2] 서적 Dizionario biografico degli Italiani
[3] 서적 Les Carolingiens: Une famille qui fit l'Europe https://books.google[...] Hachette Littérature
[4] 문서 彼の母の父ボソの娘で、伯母にあたるテウトベルガは、ロタリンギア王ロタール2世妃となった 1988
[5] 서적 Dizionario Biografico degli Italiani: LXI Guglielmo Gonzaga – Jacobini
[6] 서적 The Bosonids or Rising to Power in the Late Carolingian Age https://books.google[...] http://www.societyforfrenchhistoricalstudies.net/ Society for French Historical Studies 1988-04-01
[7] 서적 Les Carolingiens: Une famille qui fit l'Europe https://books.google[...] Hachette Littérature
[8] 문서 직책은 879년 9월 9일까지 보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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